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정희/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 (문단 편집) === [[전두환]] === || [[파일: 전두환대대장시절.jpg|width=100%]] || [[전두환]] 입장에서 박정희는 반평생을 섬겼던 그의 상관이었다. 박정희가 [[소장(계급)|소장]]이던 시절에 전두환은 [[대위]]에 불과했으니 계급 차이가 상당했었다.[* 그야 [[전두환]]은 최초의 정기육사 세대인 육사 11기이고, 박정희는 육사가 막 생기던 시절 육사 2기였으니 나이 차이에 비해 계급이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. 박정희 시절엔 육사가 제대로 자리잡히지 않았던 터라 초고속 진급이 가능했다. ] 나이 차이도 14살이니, 당연히 전두환은 박정희에게 찍소리 못했을 수밖에 없다.[[https://youtu.be/tayOnj_YVXw|#]] [[5.16 군사정변]] 직후 전두환은 지지시위를 벌임으로써 박정희의 눈에 들게 되었고 이후 군 내 요직을 두루 거치며 출세가도를 달렸다. 전두환에게 있어 박정희는 주군이자 은인인 셈. 박정희는 전두환을 위해서 불법 조직인 [[하나회]]를 만들어 주고 이후 꼭 하나회 출신들 위주로 진급시켜주었다. 대위까지는 동기들 중 가장 진급이 느렸던 전두환이었지만 박정희의 도움 덕분에 [[소령]]은 그 계급을 달고 있는 척만 하고 사실상 생략한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짧게 달고 있었으며 중령부터는 되려 동기들 중 가장 진급이 빨랐다. 박정희가 아니었으면 잘해야 중령 정도에서 제대했을 전두환은 순전히 박정희 덕분에 [[장성급 장교]]가 될 수 있었다. 심지어는 박정희 덕분에 당시 장성급들도 못 건드리는 존재가 되기도 했다. 이게 어찌나 심했던지 [[12.12 군사반란]] 당시 '''[[차규헌]], [[유학성]], [[황영시]] 이 3명의 __[[중장]]들이 [[소장(계급)|소장]]인 전두환의 부하__로 활약했을 정도였다.''' 둘 다 [[쿠데타]]로 집권한 [[군인]] 출신 [[독재자]]라는 공통점이 있음에도 둘에 대한 평가의 차이는 아주 극명하다. 박정희는 [[독재]]를 했음에도 [[농업]] 국가였던 대한민국의 [[한강의 기적|경제 성장 및 국가 인프라 구축]]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등의 공이 있다. 문제는 1972년 이후 [[체육관 선거]]를 했다는 것.[* 2009년 [[노무현]] 대통령 서거 이전까지는 역대 대통령 선호도 조사에서 항시 1위였고, 대중적으로도 긍정적인 평가가 압도적인 편이었다. 박정희 향수를 통해 산업화 세대의 지지를 얻어 [[박근혜]]가 정치 입문을 하고 결국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점이 그 증거이다.] [[전두환 정부]] 시기에도 [[3저 호황]] 덕분에 경제는 좋았다고 할 수 있다. 그러나 3저호황의 원동력이었던 저달러, 저금리, 저유가가 전두환이 잘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 이상 전두환의 공이라고 보기도 힘들뿐더러 전두환은 집권 과정에서 [[5·18 민주화운동]]을 유혈 진압하고 체육관 선거에 근거한,[* [[간선제]] 자체는 독재를 의미하지 않고,(당장 [[미국 대통령 선거]]가 간선제다) 오히려 [[대통령중심제]]+[[직선제]]의 조합이 독재에 악용될 위험을 앉고 있다. 실제로 박정희, [[장제스]]&[[장징궈]] 부자, [[수하르토]]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독재자들이 보여주기식 선거 방식으로 택한 것도 직선제였다. 전두환의 민주적 정당성이 가진 진짜 문제는 '간선제'라는 것에 있는 게 아니라, '제대로 된' 간선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.] [[민주주의]]에 완전히 어긋나는 '''독재자'''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평가가 압도적이다.[* 박정희는 [[제7대 대통령 선거]](3선) 때까지는 국민들의 직접적인 선거를 통해 당선됐었고, 전두환과 달리 [[광주 학살|학살]]을 저지른 적은 없다. 이것이 박정희와 전두환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.] 박정희는 [[대한민국 보수정당|보수정당]]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일부 [[민주당계 정당|민주당계]] 정치인들도 산업화에 대한 공을 인정하는 경우가 많으나, 전두환은 [[극우]] 성향을 가진 사람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좋아한다고 봐야 한다. 또한 이후의 행적 역시 두 사람의 평가를 가르는데 물론 박정희는 측근인 김재규에게 [[10.26 사태|암살 당하면서]] 생을 마쳐서 이후 행적이 없긴 하지만 전두환은 퇴임 이후 광주 폭동 발언이나 추징금 미납, 손녀 전수현의 한국 비하 발언 등으로 사망한 이후까지 비판을 받고 있다. 단순히 [[적의 적은 나의 친구|호남 지역에 대한 반감]]으로 옹호하거나, [[1980년대]] 경제 황금기에 대한 향수 때문이지 전두환 개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.[* 인터넷이 발달한 현재 인터넷상에서 전두환이 그립다는 글을 쓰고 전두환이 죽었을 당시 추모하는 글이 올라오는 등 아예 없는건 아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